밀양, 그 진실이 드러나길 이계삼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사무국장
밀양 어르신들의 10년의 투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르신들의 남은 생애에 이 싸움은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어르신들의 생애를 펼쳐 담아낸 이야기책의 발간에 즈음하여 우리는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밀양 송전탑은 널리 알려졌지만, 여전히 오해와 몰이해의 문턱에서 서성이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 싸움을 쭈글쭈글한 극노인들이 경찰 방패에 가로막혀 애처롭게 울부짖거나, 포클레인 아래서 몸에 쇠사슬을 묶은 채 농성하는 어떤 스펙터클로만 기억한다. 어떤 이들은 어르신들을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어난 탈핵의 분위기를 증폭시킨 견인차로 기억하고 대기업과 도시 소비자들의 편익을 위해 시골 노인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에너지 정책의 모순을 폭로한 주역으로 존경하지만, 다른 이들은 외부세력과 연계하여 국책사업을 대책 없이 지연시킨 님비의 화신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업이란, 이 싸움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어르신들의 생애와 이 싸움의 소회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법과 제도의 모순을 폭로하고, 저들에 의해 저질러진 무간지옥의 폭력을 증언하는 과업일 것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오해와 몰이해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밀양 송전탑의 진실을 분명한 의미의 지평 위로 옮겨놓는 일이 될 것이다.
싸움의 시작
밀양 송전탑 사업은 2005년 환경영향평가 보고서 주민설명회를 통해 처음으로 주민들한테 알려졌다. 2000년 계획 당시 신고리핵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창녕 북경남변전소까지 송전한 뒤, 다시 신충북변전소를 거쳐 수도권 전력의 관문 역할을 하는 신안성변전소까지 보내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된 이 사업은 그러나 2004년 3차 전력수급계획에서 신충북-신안성변전소 연계 계획이 취소됨으로써 폐지의 수순을 밟는 것이 마땅했다. 해외에서는 1,000킬로미터 이상의 장거리 송전에서만 사용하는, 일반 초고압 송전탑인 345kV 송전선의 최대 5배에 이르는 초고용량 765kV 송전선을 겨우 영남권 전력 수급을 위해 90킬로미터 단거리로, 그것도 밀양처럼 논밭 위로, 마을을 관통하거나 병풍처럼 둘러싸면서 건설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고리 지역의 핵 발전소를 6기에서 8기까지 증설하고, 고리 지역의 노후 핵 발전소 4기를 설계수명이 종료된 이후에도 연장 가동하여 10기에서 12기의 핵 발전소를 한 곳에서 운영하려는 위험천만하기 이를 데 없는 핵 마피아들의 야심은 어떻게든 765kV 송전선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전력은 ‘낙장불입’의 자세로 이 계획을 거두지 않았고, 끝내 강행했다. 2005년 가을, 상동면 여수마을 주민들이 한국전력 밀양지사 앞에서 항의시위를 개최하면서 10년에 걸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국민권익위원회가 주관한 갈등조정위원회, 지역 국회의원이 주관한 대화위원회, 경실련이 주관한 제도개선위원회, 국회 산업통산자원위원회가 주관한 전문가협의체 등 여러 기구가 구성되어 해법을 찾으려 했지만 한전의 보상 중심의 논리와 백지화, 경과지 변경, 지중화, 핵발전 증설 반대 등의 요구를 가진 주민들과는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밀양 송전탑 싸움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이전, 그러니까 밀양시 5개면 전역에서 전방위적으로 공사가 강행된 2011년 여름 무렵부터 2012년 1월까지 주민들이 현장에서 인부와 용역에게 당한 폭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주민들의 기를 꺾기 위해 인부들이 고령자인 주민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일은 다반사였고, 심지어 무릎이 좋지 않아 산길을 기다시피하며 벌목을 막아내는 주민들에게 ‘워리, 워리’ 하면서 개를 부르듯 조롱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2011년 가을, 태고종 소속 비구니 스님 한 분이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과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음부를 주먹으로 구타당하는 끔찍한 성폭력 사고가 났지만, 당시 이 사건의 가해자들은 성폭력 부분은 강간 의사가 없었다는 이유로 혐의 없음, 폭행 60만 원, 모욕 30만 원 약식기소로 종결되는 황망한 사태도 있었다.
송전탑 싸움에서 탈핵운동으로
2012년 1월 16일, 이치우 어르신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밀양을 찾은 탈핵희망버스를 시작으로 전국의 생협, 가톨릭 등 종교단체 소속 종교인, 지식인, 노동자, 교사, 대안학교 학생 등이 밀양을 직접 방문하게 되면서 밀양 송전탑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많은 활동가, 시민, 노동자, 종교인들이 방문하게 되었을 때 주민들, 특히 할머니들은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식사를 대접하고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투쟁을 생생하게 증언하였으며,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땅과 고향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밝히셨다. 이러한 한결같은 환대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밀양 현장을 방문한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리하여 밀양 싸움이 ‘보상금 더 받아내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땅과 고향을 지키고, 지금 이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할매들의 투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지역의 관변과 정치권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끝내 사망사고까지 발생하였을 때, 가장 힘없고 약한 주체, 아주머니, 할머니 같은 여성들이 남게 되었을 때 오히려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된 것이다. 정부와 한국전력, 그리고 보수 언론은 ‘탈핵세력이 핵발전 반대 투쟁 하다가 안 되니까 밀양에 우르르 몰려 있다’,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 밀양 송전탑 싸움으로 탈핵운동의 지평이 송전망까지 넓어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에너지 정책도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게 되었다.
정부는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2013)에서 핵발전과 석탄화력을 중심으로 한 대용량발전과 장거리 송전이 송전망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서라도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전기 수요지에서 소규모 발전으로 수요를 직접 충당하는 ‘분산형 전원 정책’을 공론화하기에 이르렀고, 6차 장기송배전계획(2013)에서 ‘지중화’ 방식으로 가공 송전선 건설을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한, 대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산업용 전기를 원가 이하로 공급하고, 이를 위해 대용량 핵 발전소 단지와 장거리송전망을 중심으로 한 작금의 에너지 수급 체제가 성립되었다는 사실도 밀양 싸움을 기점으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공동체 분열의 상처는 갈수록 깊어가지만, 아무것도 치유되지 않았다. 그 속내를 조금 더 들여다보기로 하자.
사전 협의 미비와 밀어붙이기
밀양 송전탑 경과지 주민들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설치된 765kV 송전선로인 당진화력발전소-신안성변전소 구간을 답사한 적이 있다. 현지 주민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철탑이 들어서는 줄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었다. 한전에서 버스 태워주기에 하루 관광을 다녀왔고 원래 송전탑이 많았던 곳인지라 그저 전봇대 하나 정도 더 들어서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철탑보다 훨씬 크고 높으며(765kV 송전탑은 높이만 100미터가 넘는 35층 건물 크기다), 전선도 주렁주렁 걸린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선 것이다. 주민들은 ‘사기당한 기분’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2000년 8월 신고리-북경남-신충북-신안성으로 이어지는 765kV 계획이 확정된 후, 2002년 9월 송전선로 입지선정 실무협의회에서 후보 경과지가 선정되고, 2003년 10월 경과지가 확정되는 동안 해당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 계획에 대해 전혀 들었던 바가 없었다.
유일하게 법적으로 강제된 절차인 환경영향평가 주민설명회에 참석한 인원은 단장면 50명, 상동면 38명, 부북면 10명, 청도면 28명으로, 이는 송전선로가 통과하는 5개 면의 인구 21,069명 중 0.6%에 불과하였다. 그 정도로 주민들에게는 비밀 상태에서 이 사업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비밀주의와 주민 배제가 이 싸움을 10년의 장기 투쟁으로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2013년 12월 2일 음독자결하신 상동면 고정마을 유한숙 어르신은 경과지가 확정된 지 10년이 지난 2013년 11월 초, 한국전력 차장과 대학교수 1명이 자택을 방문했을 때 자택과 농장이 송전선로에서 고작 200미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고민 끝에 결국 음독자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한전은 밀양의 갈등을 겪고 나서부터 입지선정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지만, 밀양 주민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방적 통보만 받았을 뿐이었다.
전력산업의 전반을 관장하는 일반법은 전기사업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78년 전원개발촉진법이라는 특별법으로 발전과 송변전 시설 건설 절차를 관장하고 있다. 전원개발촉진법에 의하면, 발전소와 송변전 시설 부지는 토지 소유자의 동의가 없어도 강제로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전원개발사업 승인을 얻게 되면 10여 개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각종 인허가 절차를 생략하게 된다. 지방자치단체의 이의제기와 감시 감독의 권한도 사실상 없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개발 고속도로에 올라타게 되는 것이다. 이 법의 위헌성, 악법성은 밀양 송전탑 싸움 과정에서 수없이 지적되어왔지만 아직까지도 개정 움직임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충돌이 발생할 때 경찰은 ‘이미 법적으로 모든 절차가 완결되었다’는 논리를 가장 즐겨 사용한다. 따라서 이를 막아서는 주민들의 모든 노력은 ‘불법’인 것이다. 일생 일구어온 재산이 강탈당하고, 100미터가 넘는 송전탑과 거기 주렁주렁 매달린 송전선으로 주민의 생존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여기에 저항하는 천부의 자연권은 ‘불법’으로 매도당하는 것이다.
한전은 밀양 송전탑 사태가 10년씩 지속되는 동안 ‘단일 사건 최대의 고소 고발’로 불릴 만큼 고소 고발을 남발하였다. 2012년 1월 이치우 할아버지가 분신자결하기 이전까지 한전이 공사 현장에서 공사를 막아서는 주민들에게 제기한 고소 고발 사례는 200건을 넘어섰으며, 그 이후에도 3명의 주민에 대한 10억 손배소, 8명의 주민에 대한 공사방해금지가처분신청(위반 시 1일 100만원), 공사 현장에서 벌어진 각종 방해 행위에 대하여 20여 명의 주민들에 대한 고소 고발을 이어갔다. 현재에도 반대 대책위 대표를 포함한 주민 25명에게 공사방해금지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져 있는 상태이며, 2014년 3월 다시 16명에 대해 공사방해금지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는 등 한전은 ‘툭하면’ 고소 고발로 주민과 대책위를 겁박한다.
경과지 주민 누구라도 이 부당하기 짝이 없는 송전탑 건설에 맞서 처음에는 저항하게 된다. 그러나 한전은 이미 획득한 법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업무방해’라는 전가의 보도로써 앞장서는 이들에 대해 법적 조치로 들어가고, 재산가압류 조치까지 이르게 되면 주민 활동가들은 웬만하면 주저앉게 된다. 그것이 지금껏 한전이 써온 방식이었다. 밀양에서는 이 약발이 별로 먹히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이들은 주저함이 없다.
송주법이라는 미봉책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외면
밀양 주민들의 투쟁으로 정부와 여당이 입법에 성공한 ‘송변전 설비 주변지역 지원법’은 한때 ‘밀양법’으로 알려졌고, 지금은 ‘송주법’이라는 약칭으로 불린다. 송주법은 그동안 한전이 자체 내규로 법적 근거도 없이 임의로 보상금을 집어주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진전이라고 저들은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송주법은 송전선로 갈등을 ‘얼마 되지 않는 쥐꼬리 보상’으로 틀어막기 위한, 그러니까 주민들이 입을 피해를 덜어주거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송전선로를 더 쉽고 원활하게 깔려고 만들어진, 철저히 한국전력과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입안된 것이다. 따라서 밀양 주민들은 애초부터 송주법을 반대했다.
정부와 한국전력은 보상의 기초가 되는 주민들의 재산 피해와 건강 피해에 대한 실태조사 없이 자기들이 임의로 선을 그었다. 765kV 송전선로의 경우 직접보상의 범위를 송전선 좌우 33미터(기존 3미터) 감정가 15~20퍼센트 보상, 송전선로 좌우 180미터 이내 주택에 대한 매수 청구권 부여로, 간접보상의 범위를 송전선 좌우 1킬로미터 이내로 정하고 해당 마을에 지원금을 주는 방식으로 확정했다. 직접보상 33미터, 간접보상 1킬로미터, 주택 매수 180미터로 설정된 근거가 없다. 주민들의 피해 정도가 아니라 한전의 손익 관계가 기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밀양 송전탑을 계기로 어느 정도 알려진 것처럼 초고압 송전선에서 발생하는 전자파와 소음 문제는 매우 심각하지만 여전히 빙산의 일각만이 드러나 있다. 충남 서산시 팔봉면을 지나가는 345kV 송전선로 200미터 이내에 사는 주민들 세 명 중에 한 명이 암으로 죽거나 투병하고 있다고 한다. 100미터가 넘는 위압적 철탑이 그 곁에 사는 주민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고통 문제도 누락되어 있다. 피해 지원금이 어떻게 관리되고 사용될지에 대한 방안도 적시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되면 매년 마을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간접보상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주민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질 것이다. 또한 송주법은 그동안 고스란히 그 피해를 입어온 기존 선로 주민들을 보상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형평성 문제가 불거졌고, 제정 직후부터 위헌성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정부와 한전은 송주법 제정으로 보상과 관련한 법 제도는 이미 정비되었고, 자신들이 할 일은 다 했다는 식으로 선전하고 있다.
보상 합의 여부로 공동체 분열
현행 송주법 상으로 765kV 송전선 간접보상 지역으로 설정된 지역은 송전선 좌우 1킬로미터이다. 그러나 법 제정 이전부터 시작된 밀양 송전탑에서 한전은 1.5킬로미터 내에 있는 마을까지 간접보상 범위에 넣어 마을 단위 협상을 진행해왔고, 개별 보상까지 받게 해주었다. 그에 따라 지난 10년간의 싸움에서 주민들의 표현을 빌자면 ‘데모 한 번 안 나오고, 피해도 거의 없는’, 1킬로미터 범위를 벗어나는 5~6개 마을 수백 명의 주민들이 보상금을 받게 되었고, 이들이 합의에 이르게 되자 밀양송전탑 경과지가 보상 합의 분위기로 기울고 있다는 한전의 선전이 유포되었다.
그러나 송전선로의 특성상 거리가 멀수록 재산 및 건강의 피해는 줄어들게 되며, 765kV 송전탑의 경우 1킬로미터를 벗어나게 되면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생기는 것은 여전하지만, 철탑이 주는 심리적 위압감이나 건강상의 피해는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 때문에 정부와 막강한 공권력을 상대로 기약 없는 싸움을 해나갈 자신이 없는 상당수 주민들은 투쟁을 지레 포기하게 된다. 한전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송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주민들을 보상 대상에 포함시켜 피해가 큰 송전선 인접 주민들을 고립시키는 전술을 택해왔고, 그 전술이 지금까지 먹혀온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밀양 송전탑 경과지에는 수십 년 이래 이웃마을로 정을 나누어온 마을들이 보상 합의 여부로 극심한 분열을 겪고 있고, 이는 한 마을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전은 한 마을 안에서도 주민들을 분열시키는 술책을 쓰고 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을 주민들에게는 ‘이 기약 없는 싸움을 언제까지 해나갈 것인가’, ‘저 막강한 정부와 공권력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론이 유포된다. 또한 관변조직에 속해온 주민들, 여당과 가까운 주민들은 투쟁에 회의적이다. 또 주민들 사이의 인간적인 갈등의 골도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한 마을 안에서도 송전탑에 가까운 지역과 먼 지역이 나뉘어 있다. 한전은 이런 지점들을 파고들면서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주민들과 먼저 협상을 진행한다. 대부분 마을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찬성 주민들의 숫자를 불리고 끝내 합의에 이르게 된다. 한전의 내규로는 자칭 대표라는 5인의 주민만 확보되면 한전과 협의를 진행할 수 있고, 전체 주민 과반의 동의만 받아내면 마을 합의로 받아들여진다. 이를테면, 산외면 ○○마을은 송전선에 가까워서 피해가 큰 A 동네와 상대적으로 떨어져 피해가 적은 B동네가 있다. 그런데 피해가 적은 B동네에서 5인이 스스로 대표랍시고 한전과 협상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마을에는 송전탑 관련 업무를 일임하는 대표 선임계에 날인한 주민 연명부가 있었는데, 5인은 이를 한전과의 합의 체결 연명부로 위조하여 한전과 합의를 체결하게 된다. 거기서 받아낸 10억 5,000만 원의 합의금은 마을 공동영농사업에 사용하도록 합의서에 명시되어 있지만, 이들은 마을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유휴지를 7억 5,000만 원에 매입하였다. 이 사실이 폭로되자 2013년 벽두부터 현재까지 그 A동네와 B동네는 한 마을에 살면서도 집안 제사에도 내왕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분열에 휩싸여 있다.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다
2013년 7월, 밀양 송전탑의 해법을 위해 마련된 네 번째 기구인 ‘전문가협의체’가 파행 끝에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그때부터 산업부 장관은 세 차례에 걸쳐 무려 6일이나 밀양에 머무르며 밀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로 뛰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러나 그 세 번의 방문 동안 실제로 반대 주민들을 만난 시간은 딱 반나절에 그쳤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일부 찬성 주민들, 그리고 밀양 지역 유지, 관변단체, 밀양 시장 등을 만났다. 그리고 산업부 장관과 국무총리는 밀양시에 나노산업단지 유치를 약속했고, 이때부터 상공회의소, 밀양지역 관변단체들의 파상공세가 노골화되었다. 반대 주민들은 ‘밀양을 살리기 위해 당신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에 시달려야 했고, 주민들을 돕는 반대 대책위는 ‘주민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야심을 채우는 세력’이라는 근거 없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정부가 지역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하였고, 지금까지도 수습하기 어려운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지금까지 밀양 송전탑 싸움은 12회에 걸친 공사 시도와 주민들의 저항으로 인한 공사 중단이 반복되었다. 주민들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치열하고 또 집요하게 한전의 공사를 막아냈다. 때로는 단식투쟁으로, 때로는 현장 점거로, 헬기장을 점거하거나 국회 상경투쟁으로, 노천 노숙농성으로, 포클레인을 점거하거나 레미콘 차량 앞에 드러눕는 등 눈물겹게 공사를 저지시켜왔다.
그러자 한전은 2013년 5월 공사 재개 때부터 공권력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13년 10월 공사 재개 당시에는 하루 3,000명의 막대한 병력이 공사 현장으로 나 있는 모든 길을 봉쇄하고 24시간 경비를 서면서 주민들의 현장 진입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한전이 아니라 경찰과 싸우게 되었다. 6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주민 112명이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응급 후송되었고, 73명의 주민과 연대 시민들이 경찰 조사를 받거나 연행되었다.
주민들은 형광색 경찰 제복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한다. 경찰은 현장과 멀리 떨어진 진입로를 봉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민 활동가들의 집을 파악하기 위해 마을 골목을 서성이기도 하고, 때로는 80대 후반의 노인들에게도 출석요구서를 보내거나 임의동행 방식으로 연행하기도 한다. 현장에서는 주민들이 젊디젊은 의경들과 몸싸움을 하면서, 때로는 강제 해산을 당하면서 입은 상처와 모멸감을 호소하지 않는 주민들이 없다. 이러한 공권력의 준동은 주민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주민들의 집단적인 우울과 불안감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2013년 5월 공사가 중단된 직후 주민들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실태를 조사했을 때 주민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고위험군 비율이 9·11테러를 겪은 미국 시민의 네 배 수준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고, 2013년 12월 헬기를 사용한 전방위적인 공사가 진행 중이던 시점에 다시 조사하였을 때 전체 주민의 87퍼센트가 높은 수준의 우울감을 호소했고, 10.7퍼센트 주민이 ‘기회만 있으면 자살하겠다’고까지 답했다.
‘경찰 없으면 한전은 밀양에서 송전철탑 한 기도 못 꽂는다’는 주민들의 주장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한전은 오직 경찰의 힘으로만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경찰이 ‘한전 사설경비업체’로 전락해버렸다는 밀양 주민들의 주장은 엄연한 진실이며 이로 인하여 주민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조사 이후 현재까지 40여 명의 주민들이 대책위의 주선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으며, 전문 상담 인력의 도움으로 심리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밀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일생토록 국가가 시키는 대로 협조하였고, 수십 년 이래 일관되었던 폐농, 살농 정책에도 묵묵히 농토를 일구며 삶의 자리를 지켜온 주민들이 노년에 맞이한 이 폭력은 너무나 모멸적이고 또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밀양 주민들은 급진적이거나 공상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살게 해달라’, ‘잘못된 법제도를 정의롭게 고쳐달라’는 요구가 그렇게 급진적이고 공상적인가. 밀양 송전탑에 연대하는 전국의 시민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사람 죽여서 얻는 전기, 우리는 필요 없다’는 단호한 선언은 ‘전기는 밀양 노인들의 피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진실에 입각해 있다. 우리 사회는 밀양 송전탑 사태가 어떻게 끝나든, ‘이 말도 되지 않는 에너지 수급 체제’를 언제까지 온존시킬 것이냐는 중대한 질문 앞에 언제나 마주서게 될 것이다.
주민들은 고통스러운 학습의 터널을 통과했다. 주민들은 이제 당당하게 핵발전에 대해서도 문제제기한다. 주민들은 핵발전이 값싼 청정에너지라는 주장을 들으면 낯빛을 붉혀가며 비판한다. “핵발전이 싸다고? 폐기물은 어떡할 거냐? 송전탑 세운다고 이 많은 사람들 피눈물 쏟게 하고, 보상이다 뭐다 해서 이웃끼리 싸우게 만든다.” “사람이 죽었지 않느냐, 사람 죽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어디 있느냐?”며 침을 튀겨가며 말한다. 금전의 논리로 환산할 수 없는 ‘생명의 계산법’을 주민들은 체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한전의 막강한 무력 앞에서 철탑은 한 기, 두 기, 하루가 다르게 올라간다. 마지막 순간까지 항전하겠다는 주민들의 의지는 흔들림이 없다. 그들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싸움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던 것일까?
주민들이 마주서야 했던 것은 국가폭력이었고, 시대의 모순 그 자체였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와 안락이 감추고 있는 비참하고도 서글픈 맨얼굴이었다. 주민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배워야 한다. 아픈 이야기 속에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http://my765kVout.tistory.com/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278-6 번지 (삼문동)
○ 전화 : 010-9203-0765
○ 후원계좌 : 815-01-227123, 농협, 이계삼(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