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말해
밀양 상동면 도곡마을


“이걸 우째 이고 왔는교?”,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송전탑 저게 9년째 아이가. 산 만데이까정 얼매나 가고, 대닐 만치 대니고 마이 했다 아이가. 손 끄트이 다 벗겨져가미 기어 올라갔다 카이. 올라가는 데 세 시간 걸리대. 올 봄에는 요놈의 손들이 계속 다니니께 하도 분해가 시청 앞에 앉아가 내가 실컷 울어뿟어. 남이 보기나 말기나 실컷 울어뿟더니만, 수녀 아줌마들이 와가지고 “할매 와카시는교? 와카시는교?” 한이 맺히고 원이 맺혀가, 북받쳐서 웁니다. 원통해서 울고 분해갖고 울고 한이 맺혀가 웁니다. 눈물밖에 안 남았심더, 눈물밖에 안 남아서 웁니다. 그랬다 카이. 


요놈의 손들, 여기 전시만시(온갖 데) 와가지고 온갖 거 다 세워놓고. 우린 못하구러 말릴라꼬 온 전시 다 댕기고. 세상 그렇게 못하구러 하고, 저건 할라 카고. 우린 저거 들어오면 못 사는데. 땅 손바닥만 한 거 사놨는데 물거품 되는데. 언제 누가 살아도 여긴 물 좋고 공기 좋고. 손주들 와서 살고 누가 와도 다 잘살 낀데. 자꾸 밑으로 내려오믄 이제 못 산다. 송전탑 저거 보통 것도 아니고 76만 5,000볼트 디게 센 게 와가, 저 청도 가서 갈라진다 카이. 밑에 산소도 파내라고 지랄병하는데 우야겠노. 그게 우리 시아바시 산소 옆도 지난다니까. 저거도 해로우니께 산소 파내라 카지. 센 게 들어오만 2, 3년 있으만 감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안 되는 기라. 저거 오면 이 골짜기 못 산다. 

···

이 골짜기 커갖고 이 골짜기서 늙었는데 6·25 전쟁 봤지, 오만 전쟁 다 봐도 이렇지는 안 했다. 이건 전쟁이다. 이 전쟁이 제일 큰 전쟁이다. 내가 대가리 털 나고 처음 봤어. 일본시대 양식 없고 여기 와가 다 쪼아가고, 녹으로 다 쪼아가고 옷 없고 빨개벗고 댕기고 해도 이거 카믄. 대동아전쟁 때도 전쟁 나가 행여 포탄 떨어질까 그것만 걱정했지 이러케는 안 이랬다. 빨갱이 시대도 빨갱이들 밤에 와가 양식 달라 카고 밥 해달라 카고 그기고. 근데 이거는 밤낮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이건 마 사람을 조지는 거지. 순사들이 지랄병하는 거 보래이. 간이 바짝바짝 마른다. 못 본다 카이, 못 봐.



김사례
밀양 부북면 평밭마을


“오목조목 살림하며 사는 게 남은 소망이라”,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7년간 이어져온 투쟁이다. 그녀는 이곳 부북면 움막을 지키며 다른 할머니들과 최선을 다해 싸워왔다.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국 송전탑이 들어온다면.” 송전탑이 하나둘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이 질문이 늘 이마에 걸려 있다. 그래도 앞으로는 어디서든 송전탑을 세우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7년 동안 투쟁을 해오면서 그녀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리고 ‘저들’이 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송전탑이 자고 나면 떡 보이고 자고 나면 떡 보이고…… 맥이 하나도 없다. 살맛이 안 난다. “이게 들어오면 우리가 생명을 보존하고 살 수 있을까. 눈만 뜨면 시야를 가로막고 괴물같이 서 있을 텐데.” 그녀들의 한숨이 깊어진다. 


송전탑은 그녀들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지고 있다. 바람 불면 소리가 휘휘 난다. 철탑만 들어오겠나, 싶다. “나중에는 완전 거미줄처럼 새끼를 칠 거다.” 시야를 가로막는 송전탑을 보며 막막한 심정으로 기도하듯 읊조린다. “이래서 우리가 그렇게 목숨 걸고 싸웠던 거구나. 내가 싸우지 않다가 이걸 봤으면 얼마나 후회했겠나. 송전탑 안 들어오게 하려고 그리도 오래 싸웠는데 그래도 들어왔구나. 그러나 역시 싸웠으니까. 이제 어쩔 수 없다. 내 힘으로는 되지 않는가 보다.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우리 정말 많이 싸웠다. 밤낮없이.” 송전탑 건설을 막는 싸움은 이렇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되었다. 싸웠기에 후회가 없다.


조계순
밀양 상동면 도곡마을


“소인으로 태어나 이만하면 됐다”,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경찰들은) 겁 안 나요. 내 재산이 없어져서 애가 쓰려 갔지. 내 뭐 도둑질했나, 거짓말을 했나? 그런 거 걱정하는 건 없었습니더. 또 내가 너무 억울하고 이래가 그 뭐꼬 희망버스가, 손님이 그리 많이 왔을 적에 아무것도 말할지도 모르고 글자도 모르는 내가, 하도 어찌 원통한지 사람들이 저래 저렇게 참 도와주로 오니 얼마나 감사한 마음인동 그래가 내가 고맙다 하는 말을 거서 했어요, 마이크 들고. 그래 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하더만. 


사람이 아무리 부자라도예 남의 도움 없이는 못 삽니더. 꼭 돈 가지고 집에만 들어앉아 사나? 그 돈을 활용을 해야 되는데 돈 쓰는 것도 서로 의지를 해가지고 쓰는 것도 있고, 모을 적에도 그 집이 참 그만큼 노력해가지고 그만큼 잘살아야지, 그 마음이 안 큽니껴? 그렇기 때문에 나도 마실에서 혼자 이렇게 살면 이놈의 전기가 우예 된다, 싱크대가 우예 된다, 보일러가 우예 된다, 그걸 돈 주고 할라 캐도 여기 기술자가 있노, 뭣이 있노? 다 이 주위에서 봐줘가지고 그리 잘 삽니더. 사람이 다 울력으로 삽니더, 울력으로예. 


이사라
밀양 부북면 평밭마을


“바다처럼 너불이가 있더라구”,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그런데 한전 사람들이 진짜 잘못을 했어. 한전 사람 너희는 안 된다. 사람은 이치에 맞게 살아야 해. 순리를 어기면 안 돼. 순리를 어기면 그 집 꼬라지가 어떻게 되겠어? 순리를 어기면 안 돼, 그런 마음이야. 너희는 구데기만도 못하다, 어떻게 재산을. 이렇게 재산을 강탈해가면서. 지금 온 사람은 어쩐지 몰라도 내가 어찌케 살았는데…… 그러코롬 할 줄 모르는 호미로 풀 뽑고 할 줄 모르는 짐승들 기르고 살아왔는데. 이 땅을 네놈에게 준다 말이고. 안 돼, 안 돼. 보상? 보상을 1억 천만 원을 준다 쳐도 우리 농사하는 사람들 못 산다, 이거야. 살 수가 없어. 사람들 보면 반갑고, 이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사랑을 하는데, 그러고 내만 살고 끝나? 2세들도 여기 와서 어머니 살게 하고 좋은 거 진짜 아는데. 그리고 손자 손녀가 있잖아. 그놈들한테 물려주어야 하는데. 내 손녀들만 물려주나? 그게 아니고, 이 나라 이 땅에 젊은이들, 후손들한테 썩은 땅을 줄 수가 없구나. 그런 아픔을 가진 내가 네놈들 오면 내 몸을 고스란히 던지더라도 이 땅은 못 뺏어간다. 못 준다라는 거야. 그러니 내가 유난히 더 욕하고 더 소리 지르고 하지.

···

그런데 나는 이 화악산이 밀양 전체를 살린다고 보거든. 왜? 북풍이 세잖아. 북에서 오는 바람이 세잖아. 밀양에 하우스고 농사를 많이 하잖아. 산이 없으면 농사를 못해.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산을 함부로 할 수 있어? (나한테는) 생명도 연장이 됐고 건강도 주고, 돈도 뭐 아쉬워하지 않게 다 도와주고 온갖 맛있는 거 다 주고. 30년 동안 그 아름다운 것을 배우고 살았고, 진짜진짜. 어떻게 그걸 말로 다 하겠어. 한 번도 갚지도 못하고…… 이 산을 위해서 어떻게 보람된 일을 해야 하는데, 이 맘밖에 없어. 


손희경
밀양 부북면 위양마을


“아버님예, 너무너무 힘들어 죽겠심니더”,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아휴…… 나도 심정이 흐트러지지. 와 이렇게 살아야 되노? 나가 와 이렇게 살아야 되노? 아휴…… 비행기가 안 다니까 살겠다. 저 빌어먹을 놈들은 와 점심도 안 쳐먹고 참도 안 쳐먹노 하거든 내가. 자꾸 가는 기야 신나게. 점심 먹고 참 먹으면 시간을 좀 둔다 아이가. 어느새 저게 126번 탑이 우뚝 서분 기야. 어우 답답해라. 내 공사는 이제 무너져뿟다. 내는 헛살았고 내 공사는 저거같이 무너져뿟다 하면서 울면서 앉았었지. 저거 우뚝 서고 완공되고 나니께 뭐 살맛도 없고. 우야건 내가 참 마치고 간다는 게 원인데. 어느 순간에 여 닥칠라는지. 세상에…… 이런 일이 들어올 줄은 내 꿈에도 생각 안 했으요. 이런 일이 들어올 줄 알았으면 그 당시에 쫓겨났으면 쫓겨났지 (시아버지에게) 내 답 안 했지. 내가 참 소박을 당해 쫓겨나왔으면 나왔지…… 

···

내 소원이, 요거를 못 막고 가면은 한이 맺히고. 막고 가면은 세상 천지에 이런 게 어딨노? 춤을 얼마나 출지도 모리겠고. 요걸 못 막고 갈까봐 그게 탁 가슴에 언치지 뭐. 이걸 막고 가야만 우리 아버님한테 안 쫓겨나오는데. 우리 아버님요, 참 깐깐하고 무십습니더. 아버님 때문에 이 철탑 말기지 아니면 뭐 그냥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면 되지. 

그때는 무슨 뜻인지, 그래 내 생각에 철탑이 들어오는지 아셨구나. 고향을 지키라 하는 그기, 그때는 무슨 뜻인지…… 그래 이제 와서야 아, 철탑이 들어오는지 아셨구나, 이 양반께서 아셨구나


곽정섭
밀양 부북면 위양마을


“해보고 싶어. 승리의 만세를 부르던, 안 부르던”,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돈이 중요한가 봐. 그리고 한창 할 때 우리 100만 원 가처분신청 받아서 갔을 때 한전이 “소 한 마리에 30만 원 주께 가서 도장 받아온나” 이렇게 했어요. 소 한 마리 30만 원씩 주면 그건 철탑이 들어오면 반드시 해롭다는 것을, 소 한 마리 30만원씩 주면 해롭기 때문에 그렇게 주는 거 아이겠습니꺼. 가처분신청 받아가지고 법원에 갔는데 마지막에 할 말 있으면 하라 카대. 그래 내가 “여게 한전 놈들도 있지마는 생각해보이소. 소 한 마리 30만 원 주면 사람 한 마리는 얼마 주는교?” 물으니 대답도 안 합디다. 

···

나는 지금 생각에는 지금꺼정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두면 안 될 거 같애. 탁 한 번 해보고 싶어. 끝까지 해가 승리의 만세를 부르던, 안 부르던 끝까지 해가꼬 반대를 하고 나갔던 사람들이, 내한테 누님이라 하고 그렇게 잘 대해주던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나가서 너무 힘들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들 때문에도 더 해야 될 꺼 겉애. 물러서지는 못할 거 같애. 안 그렇나. 그라고 동네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참 나를 좋아했거든. 동네 첨 와가지고 그래도 내가 앞에 서가 모든 거를 다 해줬거던. 해줬는데 반대하고 나갔기 때문에, 그만큼 나한테 잘해주던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갔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봐서라도 내가 이 일을 끝내고 싶어. 진짜 좋게 끝내고 싶어.


이종숙
밀양 산외면 보라마을


“돈한테는 안 되는가봐요. 힘듭니다”,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모과 두 덩이도 못 세는 내가’ 이장이 되었다고 농담하지만 그는 이 싸움의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을 안에서 갈등과 대립이 진행되며 공동체가 차츰 깨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그것을 지연시키면서 ‘남한테 부끄럽지 않은 사람다움’을 지키려고 애쓴다. 


한전은 2014년 2월 7일 보라마을에서 30세대의 동의를 받아 마을 합의를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한 달 후 100% 마을 합의를 체결했다고 선전했다. 


“‘2013년 연말까지 보상금을 타가지 않으면 마을 자금으로 회수한다’는 공식 발표가 있고 나서, 순식간에 아홉 가구만 남긴 채 합의가 이루어졌다. 새로운 임기를 시작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이장님은 ‘반대대책위의 지시를 따른다, 희망버스 때 동의 없이 참가자 숙소를 배정해주었다’는 당치도 않은 이유로 해임되어버렸다.”(<이계삼의 세상읽기>에서, 한겨레 3월 27일)


그는 마을에 있으며 이것은 아니라고 뜻을 밝히고 있다. “내가 한 말에 후회도 없고 생각도 달라지지 않았다”며 그는 여전히 그곳을 지키고 있다.


권영길, 박순연 부부
밀양 부북면 위양마을


“정부에서는 전체 거짓말을 하고 있어예”,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한전의 말은 전부 다 거짓말이거든요. 사람이 별별 희한한 짓을 하니까 한전 말은 못 믿습니다. 와 그러냐면 여기 주민들, 시장에 가는 사람들 차에 태워가지고 식사까지 시키고. 나중에 밥 먹고 온 사람이 나한테 이야기를 합니다. 한전에서는 나를 잡을라꼬 벨벨 짓도 다 했어예. 내가 고발도 돼 있제, 가처분도 돼가 있제. 또 내 집에까지 찾아와 밤낮조로 꼬일라고 ‘대문 좀 열어줘’ (내가) ‘가거라. 나는 너이 만나면 여 몬 살고 이사를 가야 한다. 내 만날라 카믄 이 자리 움막에 온나’ 하믄 여겐 안 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양심껏 살아야 그기 사람 가치가 있지. 돈이 지금 인자 내 벌어놓은 것만 해도 다 못 쓸 건데. 절대 돈 거는 추접은 돈이고 필요 없는 돈입니다. 돈 모할낀데? 사람이 살아가는 데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

“내가 보기에는 일본에도 원자력이 50여 개인데, 원자력이 터진다 카믄 3킬로가 가도 사람이 몬 산다 카는데. 그 안에 먹을거리는 정부에서 인정한다 캐도 그거는 안 팔린다고 내는 보지. 근데 정부에서는 전체 거짓말을 하고 있어예. 나쁜데 괘안타. 이거 앞으로 멀게 보고 지하로 묻어부면 안전하다 아입니꺼. 여게 밀양에 4개 면 주민들이 지금 지하로 묻는다 카믄 전부 다 대환영할 깁니다.”


구미현
밀양 단장면 용회마을


“세상일에 관심 끊고 무심히 살 수는 없습디다”,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그래서 다 잊어버려야지, 밀양 올 때 그런 생각했어요. 그냥 이제 나 혼차 조용히 살아야지, 이런 거 이제 다 잊어버리겠다, 다 생각 안 해야지 하고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한 몇 년 동안 내 생활에만 몰두했고 거의 신문또 안 봤습니다. 거의 다 잊은 듯했어요. 잊은 듯했는데, 이 송전탑 문제가 불거진 거예요. 그때 내가 처음 느낀 게 내 혼자 무심히 살 수는 없는구나. 사회의 끈은 어떻게든 엮여서 이 송전탑 줄을 따라서 내한테 또 따라왔어요.

···

그래도 그때 쌍용이니 전 사업장이 다 힘들어했다 아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있으면 안 되겠다, 일어서야겠다. 그래서 우리가 용기도 주고 우리도 받고 하자. 그래서 버스 하나에다 떠났습니다. 전국 갈등 현장에 가서 우리 다 힘내자고. 한진중공업을 시작으로 해가지고 서울에 평택, 유성기업도 갔고 용산참사 추모행사를 하는 대한문 앞에도 갔던 것 같고 곳곳을 다녔어요. 용기가 생기더라고예. 서로서로 손잡고 하면 되겠다. 너무나 많은 곳에서 힘든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우리 다 손잡고 서로 기운내고 그렇게 다시 일어서자.


희망버스 1차에 와서 그날 동화전에 치고 같이 올라갔었을 때 굉장히 뜨뜻하다나 그런 느낌이 있더라고예. 1차 저지선을 뚫고 막 사방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잖아요. 단 한 번도 뚫어본 적이 없거든예. 거기서 있는 힘을 다해서 밀고 댕기고 할 때, 참 연대의 힘이랄까. 외롭지 않은 투쟁. 이게 일회성으로 끝난 것 같지만 우리한테는 계속 남아 있어요. 이래 싸우면서도 많이 힘들어도 쫌 덜 외로워요. 이렇게 하면 저쪽에서 다 알고 있다, 시민들이 걱정하고 있다, 이런 게 있어요.


김영자
밀양 상동면 여수마을


“시작한 날이 있으니 끝도 안 있겠습니꺼”,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그녀가 준비하는 슬픔을 가늠해본다. 내 가늠이 끝나기도 전, 그녀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어느새 밀양 골짜기 안에 자리 잡은, 그녀가 그토록 사랑한 여수마을을 넘어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린다. 차마 묻지 못한 싸움의 끝을 스스로 말했다. 

“싸움을 시작한 날이 있으니 끝도 안 있겠습니꺼.”

나는 숨을 멈췄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 어떤 상황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는 다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꺼. 나는 이 싸움이 여기서 멈출 것 같진 않아요. 지금 내 마음으론. 나중에 내 생활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고. 탈핵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 되지 않을까. 내 지역의 미래를 보면 우리 지역에 송전탑이 안 들어서는 게 맞죠. 우리나라의 미래를 보면 탈핵이 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이 싸움이 끝이 나도 ‘나는 함께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우리 아들이 ‘이 싸움이 끝이 나도 엄마는 끝이 안 날 거 같습니다’ 해요. 나는 못 잊을 거 같아요. 우리 사회에 아파하는 곳이 많다는 걸. 이 순간들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거 같아요. 우리 싸움이 끝나도 그곳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작지만. 우리도 이렇게 많은 분들 도움을 받으며 싸우고 있잖아요.”

그녀의 싸움은 끝이 아닌 시작을 향해 달려간다.


안영수, 천춘정 부부
밀양 산외면 골안마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향은 지킬래예”,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와서 도와주고 이래 하는데, 하물며 우리 고향이라고 있는 사람들이 밑에 동네 사람도 그렇고 위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고향땅을 지킨다고 하면 그 무엇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고도 지켜야 된다는 의리가 있어야 되는데 돈 몇 푼에 눈이 어두버가지고 그렇게 한전 사람들한테 합의를 해준다고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송전탑 관련해가지고 다음에 고향 사람들이 와가지고 고향 이래 카면은 내가 바로 뭐라 칼 겁니다. 너거 고향 소리하지 마라, 고향 카면서 고향이 이래 난리를 지겼는데(쳤는데) 너거는 한 기 뭐 있나? 객지 생활하다 와가지고 고향, 고향 카민서 와가 그 소리하는 데가 고향이 아니다. 진짜, 고향이 이렇게 어려우면 너거가 와서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갔느냐? 우리가 어데 경찰하고 대치하고 있으면, 너거도 같이 마스크 끼고 와가지고 경찰보고 욕이라도 한마디 한 적 있느냐, 무슨 고향이냐? 고향이 아무렇게나 있어도 뭐 고향이 문제가 없단 말이냐, 엄청 뭐라 칼라고. 내가 그렇게 얘기하면 저거는 아마 꼼짝 못할 거야. 


박은숙
밀양 단장면 동화전마을


“포기할 수 없지예, 우리가 끝은 아닐 테니까”,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그전에는 솔직히, 데모하기 전에는 뭐 용산참사라던지 쌍용자동차라던지 그런 사건들, 강정마을 뭐 저런 사건들, 다들 남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일 하고 나면서부터, 내가 데모를 하면서 정부에서 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왜 저 사람들이 옥상에 올라가면서 저렇게까지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세상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지예, 이거 하면서. 정부가 얼마나 우리 국민을 우롱하면서 정치를 하는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갖고 노는 거지, 완전.

지금은 그냥 막연하게, 내가 이런 많은 경험, 왜 경험이 많으면 생각도 넓어진다 아입니꺼, 그래서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할라꼬 이런 일을 겪나, 그냥 궁금합니더.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그니까 저는 이제 포기도 물론 하고 싶을 때도 많지마는, 포기보다는 끝까지 한번 해보는 거지, 이러면서 견뎌볼라고예. 그러면서 앞으로 제가 해야 될 일, 주어지는 일이 있으면 그냥 해볼라고예.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예, 하하하.


옛날에도 내가 정치는 쇼인 건 알았거든예. 근데 이걸 하면서 완전히 쇼인 걸 제대로 알았어예. 그니깐 정부에서도 너거는 뒤지봐라, 뭐 이런 거 같아예. 정부에서 하자 카는 대로 안 하면 너거 함 죽어봐라 이런 거 같은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에, 우리가 뭐 송전탑 싸움을 꼭 이긴다 카는 문제는, 그때는 막연하게 이겼으면 하는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희망은 없을 것 같고. 우리가 송전탑을 세운 걸 뽑아낸다거나, 아니면 지금 중단을 시킨다거나 뭐 이런 힘은 없는 거 같에요. 근데 이걸 함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한테 송전탑이 얼마나 잘못됐고 뭐 이런 거를 알릴 수 있는 계기는 만들어준 거 같에요. 그래서 우리 밀양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더 잘 싸우지 않을까, 잘 싸울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기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생각은 듭니다. 우리가 끝은 아닌 것 같으니까.


강귀영
밀양 단장면 동화전마을


“헬기 소리 때문에 없는 병도 생기겠어요”,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저는 집에서 애들만 돌보고 밥하고 학교 보내고 집안일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구요. 레미콘 차 들어올 때 그날 할머니들 하는 거 보고. 경찰들이 할머니들한테 너무 심하게 하는 거예요, 여경들이. 저그 엄마 즈그 아빠도 그렇게 못하는데 완전 손을 꼬집는 게 멍이 시퍼럴 정도로 팔을 비틀거나 온몸을 다 비트는 거예요. 완전 꼼짝달싹도 못하게. 그거 보고 나서 내가 막 여경한테 얘길 했거든요. “너희 할머니들한테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니냐, 너희도 그렇게 한번 당해보면, 안 겪어봐서 모르지. 이때까지 여기서 농사짓고 산 할머니들인데 저희 집 앞에 탑이 들어오면 좋겠냐, 그렇게 싫다는 송전탑 왜 세우냐, 너희 머리 꼭대기에 세워라.” 듣는 척도 안 하고 입 꼭 다물고 있는 거예요, 여경들은. 

“한번 봐라, 니가 했는 짓 한번 봐라. 할머니 손 이런 식으로 멍 시퍼렇게 하면 되겠느냐.” 도로가에서 꼼짝달싹도 못하게 다 막고 있는 거예요. 도로에 전부 다 할머니들이 벼농사 해갖고 나락을 다 널어놨거든요. 경찰들이 밟을라고 하는 거예요. “느그 밟지 마라. 이때까지 할머니들이 고생해가지고 농사지어 놓은 것을 너희가 왜 망칠라고 하느냐, 밟지 마라, 다리 안 치우냐!”


나도 모르게 막 그런 용기가 나왔어요. 할머니들에게 너무 심하게 하니까. 할머니들이 이때까지 농사지어왔는데 할머니들 바라보고 있으니까 억울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용기가 나왔나 봐요.


김옥희
밀양 단장면 용회마을


“강에 가면 강이 좋고 산에 오르면 산이 좋고”,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지금도 마을 일이며 집안일이며 친정 일을 맡아하는 그는 힘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밀양을 찾아와서 연대해주는 사람들이 너무 고맙다.

“할매들이 위축되고 힘이 빠져 있으니까 연대자들이 와가지고 힘내라 하고, 연대자들이 정말 참 잘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투쟁하면서 밥을 한 번도 안 해먹었어요. 계속 울산에서 밥을 해왔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니 안 할 수가 없어요. 밀양 할매들 대단하다고, 모르는 사람들은 할매들이 이리 싸우는 게 남사스럽다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밀양 할매들이 대단한 거죠. 솔직히 이 정도까지 될 줄 몰랐는데 자꾸 퍼지고 소문이 나고, 요즘은 또 인터넷 이런 걸 통해서 소문이 나잖아요.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들은 다 밀양을 보는 거죠.”

···

“안 되죠. 우리는 정의로운 일이니까 싸워 이긴다, 두고 보자 너거가 잘했나 우리가 잘했나. 합의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 봐라, 어차피 공사하는데 돈 몇 푼 받아먹는 게 낫지 이러거든요. 우리는 공사는 하더라도 돈은 싫다, 한전 돈은 안 받는다, 이렇게 주장하거든. 돈 받으면 나중에 큰소리를 못 치거든요. 돈 받아먹는 건 너거 공사해라 하는 거와 똑같애. 어떤 경우에도 돈 안 받아먹고 떳떳한 게 낫지.”




밀양, 그 진실이 드러나길 이계삼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사무국장



     밀양 어르신들의 10년의 투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르신들의 남은 생애에 이 싸움은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어르신들의 생애를 펼쳐 담아낸 이야기책의 발간에 즈음하여 우리는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밀양 송전탑은 널리 알려졌지만, 여전히 오해와 몰이해의 문턱에서 서성이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 싸움을 쭈글쭈글한 극노인들이 경찰 방패에 가로막혀 애처롭게 울부짖거나, 포클레인 아래서 몸에 쇠사슬을 묶은 채 농성하는 어떤 스펙터클로만 기억한다. 어떤 이들은 어르신들을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어난 탈핵의 분위기를 증폭시킨 견인차로 기억하고 대기업과 도시 소비자들의 편익을 위해 시골 노인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에너지 정책의 모순을 폭로한 주역으로 존경하지만, 다른 이들은 외부세력과 연계하여 국책사업을 대책 없이 지연시킨 님비의 화신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업이란, 이 싸움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어르신들의 생애와 이 싸움의 소회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법과 제도의 모순을 폭로하고, 저들에 의해 저질러진 무간지옥의 폭력을 증언하는 과업일 것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오해와 몰이해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밀양 송전탑의 진실을 분명한 의미의 지평 위로 옮겨놓는 일이 될 것이다. 


싸움의 시작


     밀양 송전탑 사업은 2005년 환경영향평가 보고서 주민설명회를 통해 처음으로 주민들한테 알려졌다. 2000년 계획 당시 신고리핵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창녕 북경남변전소까지 송전한 뒤, 다시 신충북변전소를 거쳐 수도권 전력의 관문 역할을 하는 신안성변전소까지 보내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된 이 사업은 그러나 2004년 3차 전력수급계획에서 신충북-신안성변전소 연계 계획이 취소됨으로써 폐지의 수순을 밟는 것이 마땅했다. 해외에서는 1,000킬로미터 이상의 장거리 송전에서만 사용하는, 일반 초고압 송전탑인 345kV 송전선의 최대 5배에 이르는 초고용량 765kV 송전선을 겨우 영남권 전력 수급을 위해 90킬로미터 단거리로, 그것도 밀양처럼 논밭 위로, 마을을 관통하거나 병풍처럼 둘러싸면서 건설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고리 지역의 핵 발전소를 6기에서 8기까지 증설하고, 고리 지역의 노후 핵 발전소 4기를 설계수명이 종료된 이후에도 연장 가동하여 10기에서 12기의 핵 발전소를 한 곳에서 운영하려는 위험천만하기 이를 데 없는 핵 마피아들의 야심은 어떻게든 765kV 송전선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전력은 ‘낙장불입’의 자세로 이 계획을 거두지 않았고, 끝내 강행했다. 2005년 가을, 상동면 여수마을 주민들이 한국전력 밀양지사 앞에서 항의시위를 개최하면서 10년에 걸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국민권익위원회가 주관한 갈등조정위원회, 지역 국회의원이 주관한 대화위원회, 경실련이 주관한 제도개선위원회, 국회 산업통산자원위원회가 주관한 전문가협의체 등 여러 기구가 구성되어 해법을 찾으려 했지만 한전의 보상 중심의 논리와 백지화, 경과지 변경, 지중화, 핵발전 증설 반대 등의 요구를 가진 주민들과는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밀양 송전탑 싸움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이전, 그러니까 밀양시 5개면 전역에서 전방위적으로 공사가 강행된 2011년 여름 무렵부터 2012년 1월까지 주민들이 현장에서 인부와 용역에게 당한 폭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주민들의 기를 꺾기 위해 인부들이 고령자인 주민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일은 다반사였고, 심지어 무릎이 좋지 않아 산길을 기다시피하며 벌목을 막아내는 주민들에게 ‘워리, 워리’ 하면서 개를 부르듯 조롱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2011년 가을, 태고종 소속 비구니 스님 한 분이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과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음부를 주먹으로 구타당하는 끔찍한 성폭력 사고가 났지만, 당시 이 사건의 가해자들은 성폭력 부분은 강간 의사가 없었다는 이유로 혐의 없음, 폭행 60만 원, 모욕 30만 원 약식기소로 종결되는 황망한 사태도 있었다. 


송전탑 싸움에서 탈핵운동으로


     2012년 1월 16일, 이치우 어르신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밀양을 찾은 탈핵희망버스를 시작으로 전국의 생협, 가톨릭 등 종교단체 소속 종교인, 지식인, 노동자, 교사, 대안학교 학생 등이 밀양을 직접 방문하게 되면서 밀양 송전탑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많은 활동가, 시민, 노동자, 종교인들이 방문하게 되었을 때 주민들, 특히 할머니들은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식사를 대접하고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투쟁을 생생하게 증언하였으며,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땅과 고향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밝히셨다. 이러한 한결같은 환대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밀양 현장을 방문한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리하여 밀양 싸움이 ‘보상금 더 받아내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땅과 고향을 지키고, 지금 이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할매들의 투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지역의 관변과 정치권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끝내 사망사고까지 발생하였을 때, 가장 힘없고 약한 주체, 아주머니, 할머니 같은 여성들이 남게 되었을 때 오히려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된 것이다. 정부와 한국전력, 그리고 보수 언론은 ‘탈핵세력이 핵발전 반대 투쟁 하다가 안 되니까 밀양에 우르르 몰려 있다’,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 밀양 송전탑 싸움으로 탈핵운동의 지평이 송전망까지 넓어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에너지 정책도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게 되었다. 

정부는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2013)에서 핵발전과 석탄화력을 중심으로 한 대용량발전과 장거리 송전이 송전망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서라도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전기 수요지에서 소규모 발전으로 수요를 직접 충당하는 ‘분산형 전원 정책’을 공론화하기에 이르렀고, 6차 장기송배전계획(2013)에서 ‘지중화’ 방식으로 가공 송전선 건설을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한, 대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산업용 전기를 원가 이하로 공급하고, 이를 위해 대용량 핵 발전소 단지와 장거리송전망을 중심으로 한 작금의 에너지 수급 체제가 성립되었다는 사실도 밀양 싸움을 기점으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공동체 분열의 상처는 갈수록 깊어가지만, 아무것도 치유되지 않았다. 그 속내를 조금 더 들여다보기로 하자. 


사전 협의 미비와 밀어붙이기


     밀양 송전탑 경과지 주민들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설치된 765kV 송전선로인 당진화력발전소-신안성변전소 구간을 답사한 적이 있다. 현지 주민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철탑이 들어서는 줄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었다. 한전에서 버스 태워주기에 하루 관광을 다녀왔고 원래 송전탑이 많았던 곳인지라 그저 전봇대 하나 정도 더 들어서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철탑보다 훨씬 크고 높으며(765kV 송전탑은 높이만 100미터가 넘는 35층 건물 크기다), 전선도 주렁주렁 걸린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선 것이다. 주민들은 ‘사기당한 기분’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2000년 8월 신고리-북경남-신충북-신안성으로 이어지는 765kV 계획이 확정된 후, 2002년 9월 송전선로 입지선정 실무협의회에서 후보 경과지가 선정되고, 2003년 10월 경과지가 확정되는 동안 해당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 계획에 대해 전혀 들었던 바가 없었다. 

     유일하게 법적으로 강제된 절차인 환경영향평가 주민설명회에 참석한 인원은 단장면 50명, 상동면 38명, 부북면 10명, 청도면 28명으로, 이는 송전선로가 통과하는 5개 면의 인구 21,069명 중 0.6%에 불과하였다. 그 정도로 주민들에게는 비밀 상태에서 이 사업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비밀주의와 주민 배제가 이 싸움을 10년의 장기 투쟁으로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2013년 12월 2일 음독자결하신 상동면 고정마을 유한숙 어르신은 경과지가 확정된 지 10년이 지난 2013년 11월 초, 한국전력 차장과 대학교수 1명이 자택을 방문했을 때 자택과 농장이 송전선로에서 고작 200미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고민 끝에 결국 음독자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한전은 밀양의 갈등을 겪고 나서부터 입지선정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지만, 밀양 주민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방적 통보만 받았을 뿐이었다. 

     전력산업의 전반을 관장하는 일반법은 전기사업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78년 전원개발촉진법이라는 특별법으로 발전과 송변전 시설 건설 절차를 관장하고 있다. 전원개발촉진법에 의하면, 발전소와 송변전 시설 부지는 토지 소유자의 동의가 없어도 강제로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전원개발사업 승인을 얻게 되면 10여 개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각종 인허가 절차를 생략하게 된다. 지방자치단체의 이의제기와 감시 감독의 권한도 사실상 없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개발 고속도로에 올라타게 되는 것이다. 이 법의 위헌성, 악법성은 밀양 송전탑 싸움 과정에서 수없이 지적되어왔지만 아직까지도 개정 움직임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충돌이 발생할 때 경찰은 ‘이미 법적으로 모든 절차가 완결되었다’는 논리를 가장 즐겨 사용한다. 따라서 이를 막아서는 주민들의 모든 노력은 ‘불법’인 것이다. 일생 일구어온 재산이 강탈당하고, 100미터가 넘는 송전탑과 거기 주렁주렁 매달린 송전선으로 주민의 생존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여기에 저항하는 천부의 자연권은 ‘불법’으로 매도당하는 것이다. 

     한전은 밀양 송전탑 사태가 10년씩 지속되는 동안 ‘단일 사건 최대의 고소 고발’로 불릴 만큼 고소 고발을 남발하였다. 2012년 1월 이치우 할아버지가 분신자결하기 이전까지 한전이 공사 현장에서 공사를 막아서는 주민들에게 제기한 고소 고발 사례는 200건을 넘어섰으며, 그 이후에도 3명의 주민에 대한 10억 손배소, 8명의 주민에 대한 공사방해금지가처분신청(위반 시 1일 100만원), 공사 현장에서 벌어진 각종 방해 행위에 대하여 20여 명의 주민들에 대한 고소 고발을 이어갔다. 현재에도 반대 대책위 대표를 포함한 주민 25명에게 공사방해금지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져 있는 상태이며, 2014년 3월 다시 16명에 대해 공사방해금지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는 등 한전은 ‘툭하면’ 고소 고발로 주민과 대책위를 겁박한다.

     경과지 주민 누구라도 이 부당하기 짝이 없는 송전탑 건설에 맞서 처음에는 저항하게 된다. 그러나 한전은 이미 획득한 법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업무방해’라는 전가의 보도로써 앞장서는 이들에 대해 법적 조치로 들어가고, 재산가압류 조치까지 이르게 되면 주민 활동가들은 웬만하면 주저앉게 된다. 그것이 지금껏 한전이 써온 방식이었다. 밀양에서는 이 약발이 별로 먹히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이들은 주저함이 없다.


송주법이라는 미봉책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외면


     밀양 주민들의 투쟁으로 정부와 여당이 입법에 성공한 ‘송변전 설비 주변지역 지원법’은 한때 ‘밀양법’으로 알려졌고, 지금은 ‘송주법’이라는 약칭으로 불린다. 송주법은 그동안 한전이 자체 내규로 법적 근거도 없이 임의로 보상금을 집어주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진전이라고 저들은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송주법은 송전선로 갈등을 ‘얼마 되지 않는 쥐꼬리 보상’으로 틀어막기 위한, 그러니까 주민들이 입을 피해를 덜어주거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송전선로를 더 쉽고 원활하게 깔려고 만들어진, 철저히 한국전력과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입안된 것이다. 따라서 밀양 주민들은 애초부터 송주법을 반대했다.

     정부와 한국전력은 보상의 기초가 되는 주민들의 재산 피해와 건강 피해에 대한 실태조사 없이 자기들이 임의로 선을 그었다. 765kV 송전선로의 경우 직접보상의 범위를 송전선 좌우 33미터(기존 3미터) 감정가 15~20퍼센트 보상, 송전선로 좌우 180미터 이내 주택에 대한 매수 청구권 부여로, 간접보상의 범위를 송전선 좌우 1킬로미터 이내로 정하고 해당 마을에 지원금을 주는 방식으로 확정했다. 직접보상 33미터, 간접보상 1킬로미터, 주택 매수 180미터로 설정된 근거가 없다. 주민들의 피해 정도가 아니라 한전의 손익 관계가 기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밀양 송전탑을 계기로 어느 정도 알려진 것처럼 초고압 송전선에서 발생하는 전자파와 소음 문제는 매우 심각하지만 여전히 빙산의 일각만이 드러나 있다. 충남 서산시 팔봉면을 지나가는 345kV 송전선로 200미터 이내에 사는 주민들 세 명 중에 한 명이 암으로 죽거나 투병하고 있다고 한다. 100미터가 넘는 위압적 철탑이 그 곁에 사는 주민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고통 문제도 누락되어 있다. 피해 지원금이 어떻게 관리되고 사용될지에 대한 방안도 적시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되면 매년 마을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간접보상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주민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질 것이다. 또한 송주법은 그동안 고스란히 그 피해를 입어온 기존 선로 주민들을 보상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형평성 문제가 불거졌고, 제정 직후부터 위헌성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정부와 한전은 송주법 제정으로 보상과 관련한 법 제도는 이미 정비되었고, 자신들이 할 일은 다 했다는 식으로 선전하고 있다. 


보상 합의 여부로 공동체 분열


     현행 송주법 상으로 765kV 송전선 간접보상 지역으로 설정된 지역은 송전선 좌우 1킬로미터이다. 그러나 법 제정 이전부터 시작된 밀양 송전탑에서 한전은 1.5킬로미터 내에 있는 마을까지 간접보상 범위에 넣어 마을 단위 협상을 진행해왔고, 개별 보상까지 받게 해주었다. 그에 따라 지난 10년간의 싸움에서 주민들의 표현을 빌자면 ‘데모 한 번 안 나오고, 피해도 거의 없는’, 1킬로미터 범위를 벗어나는 5~6개 마을 수백 명의 주민들이 보상금을 받게 되었고, 이들이 합의에 이르게 되자 밀양송전탑 경과지가 보상 합의 분위기로 기울고 있다는 한전의 선전이 유포되었다. 

     그러나 송전선로의 특성상 거리가 멀수록 재산 및 건강의 피해는 줄어들게 되며, 765kV 송전탑의 경우 1킬로미터를 벗어나게 되면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생기는 것은 여전하지만, 철탑이 주는 심리적 위압감이나 건강상의 피해는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 때문에 정부와 막강한 공권력을 상대로 기약 없는 싸움을 해나갈 자신이 없는 상당수 주민들은 투쟁을 지레 포기하게 된다. 한전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송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주민들을 보상 대상에 포함시켜 피해가 큰 송전선 인접 주민들을 고립시키는 전술을 택해왔고, 그 전술이 지금까지 먹혀온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밀양 송전탑 경과지에는 수십 년 이래 이웃마을로 정을 나누어온 마을들이 보상 합의 여부로 극심한 분열을 겪고 있고, 이는 한 마을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전은 한 마을 안에서도 주민들을 분열시키는 술책을 쓰고 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을 주민들에게는 ‘이 기약 없는 싸움을 언제까지 해나갈 것인가’, ‘저 막강한 정부와 공권력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론이 유포된다. 또한 관변조직에 속해온 주민들, 여당과 가까운 주민들은 투쟁에 회의적이다. 또 주민들 사이의 인간적인 갈등의 골도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한 마을 안에서도 송전탑에 가까운 지역과 먼 지역이 나뉘어 있다. 한전은 이런 지점들을 파고들면서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주민들과 먼저 협상을 진행한다. 대부분 마을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찬성 주민들의 숫자를 불리고 끝내 합의에 이르게 된다. 한전의 내규로는 자칭 대표라는 5인의 주민만 확보되면 한전과 협의를 진행할 수 있고, 전체 주민 과반의 동의만 받아내면 마을 합의로 받아들여진다. 이를테면, 산외면 ○○마을은 송전선에 가까워서 피해가 큰 A 동네와 상대적으로 떨어져 피해가 적은 B동네가 있다. 그런데 피해가 적은 B동네에서 5인이 스스로 대표랍시고 한전과 협상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마을에는 송전탑 관련 업무를 일임하는 대표 선임계에 날인한 주민 연명부가 있었는데, 5인은 이를 한전과의 합의 체결 연명부로 위조하여 한전과 합의를 체결하게 된다. 거기서 받아낸 10억 5,000만 원의 합의금은 마을 공동영농사업에 사용하도록 합의서에 명시되어 있지만, 이들은 마을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유휴지를 7억 5,000만 원에 매입하였다. 이 사실이 폭로되자 2013년 벽두부터 현재까지 그 A동네와 B동네는 한 마을에 살면서도 집안 제사에도 내왕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분열에 휩싸여 있다.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다


     2013년 7월, 밀양 송전탑의 해법을 위해 마련된 네 번째 기구인 ‘전문가협의체’가 파행 끝에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그때부터 산업부 장관은 세 차례에 걸쳐 무려 6일이나 밀양에 머무르며 밀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로 뛰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러나 그 세 번의 방문 동안 실제로 반대 주민들을 만난 시간은 딱 반나절에 그쳤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일부 찬성 주민들, 그리고 밀양 지역 유지, 관변단체, 밀양 시장 등을 만났다. 그리고 산업부 장관과 국무총리는 밀양시에 나노산업단지 유치를 약속했고, 이때부터 상공회의소, 밀양지역 관변단체들의 파상공세가 노골화되었다. 반대 주민들은 ‘밀양을 살리기 위해 당신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에 시달려야 했고, 주민들을 돕는 반대 대책위는 ‘주민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야심을 채우는 세력’이라는 근거 없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정부가 지역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하였고, 지금까지도 수습하기 어려운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지금까지 밀양 송전탑 싸움은 12회에 걸친 공사 시도와 주민들의 저항으로 인한 공사 중단이 반복되었다. 주민들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치열하고 또 집요하게 한전의 공사를 막아냈다. 때로는 단식투쟁으로, 때로는 현장 점거로, 헬기장을 점거하거나 국회 상경투쟁으로, 노천 노숙농성으로, 포클레인을 점거하거나 레미콘 차량 앞에 드러눕는 등 눈물겹게 공사를 저지시켜왔다. 

그러자 한전은 2013년 5월 공사 재개 때부터 공권력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13년 10월 공사 재개 당시에는 하루 3,000명의 막대한 병력이 공사 현장으로 나 있는 모든 길을 봉쇄하고 24시간 경비를 서면서 주민들의 현장 진입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한전이 아니라 경찰과 싸우게 되었다. 6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주민 112명이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응급 후송되었고, 73명의 주민과 연대 시민들이 경찰 조사를 받거나 연행되었다. 

     주민들은 형광색 경찰 제복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한다. 경찰은 현장과 멀리 떨어진 진입로를 봉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민 활동가들의 집을 파악하기 위해 마을 골목을 서성이기도 하고, 때로는 80대 후반의 노인들에게도 출석요구서를 보내거나 임의동행 방식으로 연행하기도 한다. 현장에서는 주민들이 젊디젊은 의경들과 몸싸움을 하면서, 때로는 강제 해산을 당하면서 입은 상처와 모멸감을 호소하지 않는 주민들이 없다. 이러한 공권력의 준동은 주민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주민들의 집단적인 우울과 불안감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2013년 5월 공사가 중단된 직후 주민들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실태를 조사했을 때 주민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고위험군 비율이 9·11테러를 겪은 미국 시민의 네 배 수준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고, 2013년 12월 헬기를 사용한 전방위적인 공사가 진행 중이던 시점에 다시 조사하였을 때 전체 주민의 87퍼센트가 높은 수준의 우울감을 호소했고, 10.7퍼센트 주민이 ‘기회만 있으면 자살하겠다’고까지 답했다. 

‘경찰 없으면 한전은 밀양에서 송전철탑 한 기도 못 꽂는다’는 주민들의 주장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한전은 오직 경찰의 힘으로만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경찰이 ‘한전 사설경비업체’로 전락해버렸다는 밀양 주민들의 주장은 엄연한 진실이며 이로 인하여 주민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조사 이후 현재까지 40여 명의 주민들이 대책위의 주선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으며, 전문 상담 인력의 도움으로 심리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밀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일생토록 국가가 시키는 대로 협조하였고, 수십 년 이래 일관되었던 폐농, 살농 정책에도 묵묵히 농토를 일구며 삶의 자리를 지켜온 주민들이 노년에 맞이한 이 폭력은 너무나 모멸적이고 또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밀양 주민들은 급진적이거나 공상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살게 해달라’, ‘잘못된 법제도를 정의롭게 고쳐달라’는 요구가 그렇게 급진적이고 공상적인가. 밀양 송전탑에 연대하는 전국의 시민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사람 죽여서 얻는 전기, 우리는 필요 없다’는 단호한 선언은 ‘전기는 밀양 노인들의 피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진실에 입각해 있다. 우리 사회는 밀양 송전탑 사태가 어떻게 끝나든, ‘이 말도 되지 않는 에너지 수급 체제’를 언제까지 온존시킬 것이냐는 중대한 질문 앞에 언제나 마주서게 될 것이다. 

     주민들은 고통스러운 학습의 터널을 통과했다. 주민들은 이제 당당하게 핵발전에 대해서도 문제제기한다. 주민들은 핵발전이 값싼 청정에너지라는 주장을 들으면 낯빛을 붉혀가며 비판한다. “핵발전이 싸다고? 폐기물은 어떡할 거냐? 송전탑 세운다고 이 많은 사람들 피눈물 쏟게 하고, 보상이다 뭐다 해서 이웃끼리 싸우게 만든다.” “사람이 죽었지 않느냐, 사람 죽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어디 있느냐?”며 침을 튀겨가며 말한다. 금전의 논리로 환산할 수 없는 ‘생명의 계산법’을 주민들은 체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한전의 막강한 무력 앞에서 철탑은 한 기, 두 기, 하루가 다르게 올라간다. 마지막 순간까지 항전하겠다는 주민들의 의지는 흔들림이 없다. 그들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싸움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던 것일까? 

     주민들이 마주서야 했던 것은 국가폭력이었고, 시대의 모순 그 자체였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와 안락이 감추고 있는 비참하고도 서글픈 맨얼굴이었다. 주민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배워야 한다. 아픈 이야기 속에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http://my765kVout.tistory.com/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278-6 번지 (삼문동)

○ 전화 : 010-9203-0765 

○ 후원계좌 : 815-01-227123, 농협, 이계삼(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